살아있음의 기준은 무엇인가. 단지 호흡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나는 한낱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이에 어떤 이는 나의 시간을 경외했으나 어떤 이는 섭리에서 벗어난 이단이라며 저주했다. 저주가 통한 걸까, 수없이 많은 존재가 세상에 떨어졌다가 스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내 삶과 죽음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져갔다. 태양과 달은 매일 새로웠지만 늘 같은 하늘을 맴돌았고, 인간은 저마다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일정한 범주 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기나긴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알 수 없던 거대한 세계 속에서 보자면 그들은 쳇바퀴를 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 나는 오래 전 내게 이단이라 손가락질했던 인간을 비웃었다. ..
※ 통증(http://rannntaku.tistory.com/77)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 오이카게 온리전 "그 선배에 그 후배"에 나올 글의 일부입니다. * 토비오의 하루는 느지막이 시작되었다. 미처 뜨지 못한 눈으로 오이카와에게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고 두 번째 잠에 빠져드는데, 깨면 시계에 맞춘 듯 열두 시였다. 멍하니 빈 방을 둘러보다가 느릿느릿 일어나 샤워를 하면 열두시 반쯤. 머리는 반드시 샴푸로 감았다. 비누로 감았다고 오이카와가 삼십 분을 잔소리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밥도 그가 챙겨주고 간 반찬들로 해결했다.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휘파람 연습에 열중했다. 벌써 몇 달째인데 제대로 된 휘파람이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휙, 휙 하는 바람소리가 줄어든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토비오는 ..
*연반AU 1월의 분위기는 하늘의 떠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왠지 모를 부유감과 함께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간다. 바뀌는 것은 달력의 숫자뿐이며 해가 바뀐다고 해서 인생이나 생활이 달라지지도 않는데 사람들은 기대가 가득 찬 표정으로 거리를 오고간다. 특히나 카게야마의 직장인 바(Bar)가 있는 번화가는 더욱 그러했다. 카게야마는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을 떠올렸다. 알코올에 취해 얼굴이 붉어진 손님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카운트다운을 했고 새해가 되자마자 저마다 들고 있던 술잔이나 술병을 비웠다. 왁자지껄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카게야마는 새해 인사를 건네 오는 손님들에게 적당히 인사를 하며 셰이커를 흔들었다. 한 해가 갔다는 아쉬움도,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는 고양감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 발표가 되자마자 그동안의 작품과는 다른 몽환적이고 따뜻한 문장으로 단번에 독자들을 사로잡은 오이카와 토오루의 『별빛 사막』. 애니메이션 제작까지 결정되면서 작품을 향한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오늘은 섬세한 감정 묘사와 뛰어난 문장력에 더해 본인의 수려한 외모까지 단연 화제인 오이카와 토오루를 만나보았다. 이제껏 오이카와 토오루의 작품이 씁쓸한 에스프레소였다면 이번 “너의 색깔”은 따뜻한 우유 같은 작품이라고들 합니다. 그만큼 작품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말인데요. 혹시 계기나 이유가 있을까요? ―친한 편집장님이 사람 많이 죽였으니까 이번엔 살리는 이야기를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신 게 계기라면 계기겠네요(웃음). 그 말을 듣고 나니 정말로 제 책은 꼭 누군가가 죽더라고요. 읽고 나면 힘이 나는 이야기..
당신이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몇 번째일까요. 이제는 기억도 희미합니다. 별자리가 걸어가는 하늘을 수천, 수만 번 보았고 새싹이나 다름없던 나무도 제 두 팔로는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자라났습니다. 모래먼지가 날리던 황무지가 울창한 숲으로 변하기도 하고, 작은 샘이 거대한 호수가 되기도 했지요. 우리가 자주 거닐던 호수와 꼭 닮았습니다. 그 호수만큼 맑고 투명하진 않았지만요. 물론 슬픈 일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꽃밭이 바퀴 아래에 밟혔을 때에는 며칠을 울적한 마음으로 지냈어요. 꼭 당신과 저의 추억이 짓밟힌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슬프게 만드는 사실은 당신이 우리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겠지요. 제가 음식을 입에 가득 넣고 먹을 때면 얼마나 큰소리로 웃었는지..
* 오이카와 토오루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토요일이었다. 한 가지 다르다면 직장 후배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원치도 않은 주말 출근을 했다는 점이었다. 선배는 이렇게나 쓸모없는 지위이다. 후배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떡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하지 않으면 성가셔진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오늘은 그나마 후배가 눈치 있게 움직여서 일을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점심에 후배가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선배. 오늘이 할로윈이래요. 퇴근길에 볼만하겠어요. 후배의 말대로 길거리는 할로윈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곳곳에 호박이며, 박쥐 장식이 눈에 띄었다. 상점 입구에서는 마녀 모자를 쓴 직원이 사탕을 나눠주었다. 뱀파이어처럼 화장을 한 남녀 한 쌍이 오이카와의 옆을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젊구나. 감상은 그게 다였..
소년은 사막 한복판에 있는 마을에서 친구를 사귀게 된다. 모두가 가방에 가면을 한가득 짊어지고 다니는 별임에도 친구는 양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거리를 돌아다닌다. 친구는 상냥하지도, 잘 웃지도 않았지만 햇빛이 강할 때면 얼굴을 찡그렸고, 시원한 바람이 불면 눈을 감은 채 슬며시 웃었다. 그는 가면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소년은 곧장 마을 근처의 모래 언덕에 물감을... 느릿느릿 키보드를 두드리던 오이카와의 손이 별안간 멈춘다. 그러더니 이윽고 키보드가 부서져라 백스페이스키를 연달아 누른다. 제일 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충 인터넷으로 주문한 노트북이 다시 고장 나도 상관없다는 듯한 행동이다. 그걸로도 성에 차지 않는지 노트북을 쾅 닫아버리고 침대 위에 벌렁 누워버리지만 그마저도 눈치 없는 핸드폰이 마..
인간에게 잠이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간의 고문 중에는 잠을 재우지 않는 방법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의 일족 또한 잠을 잔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해서라기보다 시간을 때우거나 간접적인 죽음을 느끼는, 일종의 취미와 닮은 행위였다. 나의 일족은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을 꾸고 싶다면 몽마(夢魔)에게 의뢰를 하여 꿈을 사야만 했다. 꽤나 이색적인 경험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러한 작위적인 꿈 따위, 꾸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너는 어떤 꿈을 꾸고 있지? 나는 소리는 내지 않고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조용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동안 살아온 배경 탓인가, 마을과 툭 떨어져있는 낯선 성에 와서도 아이는 생활에 적응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도 보아라, 작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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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덤불에 살갗이 긁히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오이카와는 숲을 내달렸다. 뺨이며 팔에 붉은 선이 죽죽 그어졌다. 숨도 점점 가빠져 가슴이 기어코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용이 떨어졌다. 해가 없어지는 날, 세상이 잠시 빛을 잃으면 까마귀 숲의 호수를 빌어 하늘에 살던 용이 지상으로 내려온다고 했다. 모두가 낡아빠진 전설이라고 치부하던 어느 날, 어둠과 함께 찾아온 용은 까마귀 숲 근방에 있는 마을을 전부 잿더미로 만든 후에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십이 년 전 일이었다. 참사로 친우와 약혼자를 모두 잃은 오이카와에게 이번 일식은 천금과도 같은 기회였다. 그림자가 해를 완전히 가리고 용이 내려오자 오이카와는 미리 달맞이꽃 즙을 발라둔 화살을 들어 용에게 겨누었다. 화살이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