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창 밖으로 풍경이 빠르게 뭉그러졌다. 신칸센 안에는 우웅 하는 기계 소리 이외엔 침묵이 자리를 차지했다. 승객이 대부분 정장을 차려입은 직장인인 탓일지도 몰랐다. 그들 중 느긋하게 아침 신문을 읽는 이도 있었고 노트북을 바쁘게 두드리는 이도 있었다. 내 옆의 남자는 모자란 잠을 보충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조그마한 종이 가방을 품에 안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미야기 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불안감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바로 내게 아이돌이나 다름없는 K 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와는 게임에서 만났다. 얼마 전 까마귀 왕이라는 닉네임으로 AOS 게임을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우연히 “K”라는 플레이어와 게임을 하며 그의 완벽한 플레이에 마음을 빼앗겼다...
* 어느덧 9월 중순이었다. 여름에 햇볕을 피하기 위해 골랐던 등나무 밑 벤치가 제법 차가웠다. 그늘이 아니라 햇살을 찾아 자리를 옮겨야할 판이었다. 여유롭게 도시락을 바깥에서 먹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카게야마, 내 이름 불러봐.” 도시락의 계란말이를 집으면서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츠키시마.”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게야마가 대답했다. 아니, 듣고 싶은 건 그 말이 아니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감자조림을 우물거리는 카게야마의 뺨을 어쩐지 꼬집어주고 싶어졌다. “아니, 그건 라스트 네임이고. 퍼스트 네임.” “라, 뭐? 너 왜 영어 써.” 이젠 말대꾸를 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미간은 이 이상 구겨질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오늘만큼은 카게..
츠키시마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안경테를 건드렸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자신이 사인을 보내면 요리조리 돌아가는 시선이 귀엽다고 츠키시마는 생각했다. 눈동자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가 안경을 벗겨주자 그와 동시에 츠키시마가 몸을 확 기울이더니 키스를 했다. 안경테를 건드리는 것이 즉 키스라는 공식이 성립된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처음에 츠키시마는 키스할 때에도 안경을 벗지 않았었다. 안경을 벗으면 카게야마의 얼빠진 표정이나, 자신의 입술을 보느라 내리깐 눈을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키스를 하고 있는데 카게야마가 걸리적거린다며 츠키시마의 안경을 벗겼다. 눈썹을 찡그리며 다급한 손길로 자신의 안경을 벗기는 카게야마가 츠키시마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더욱 자신..
내일은 타 학교와의 연습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연습도 일찍 마무리 지어졌다. 남은 건 충분한 휴식밖에 없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아무리 해도 나른해지지 않는 눈꺼풀로 인해 몇 시간 째 자신의 침대 위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긴장 따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시합이야 중학교서부터 셀 수도 없이 많이 해왔고, 애초에 시합을 눈앞에 두고 벌벌 떠는 타입이 아니었다. 발단은 어제 낮에 있었던 우연한 만남 때문이었다. ‘우연한 만남’이라는,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 있는 단어보다는 ‘조우’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츠키시마와 기분전환 겸 오랜만에 시내에 나갔다가 쿠니미와 킨다이치를 만났다. 두 사람이 무어라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별 말 하지 않은 채 각자 가던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