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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

[오이카게] 탐련(耽戀)

RANNNTAKU 2017. 4. 2. 12:58

 

※ 통증(http://rannntaku.tistory.com/77)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 오이카게 온리전 "그 선배에 그 후배"에 나올 글의 일부입니다.

 

 

 

 

 

*

     토비오의 하루는 느지막이 시작되었다. 미처 뜨지 못한 눈으로 오이카와에게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고 두 번째 잠에 빠져드는데, 깨면 시계에 맞춘 듯 열두 시였다. 멍하니 빈 방을 둘러보다가 느릿느릿 일어나 샤워를 하면 열두시 반쯤. 머리는 반드시 샴푸로 감았다. 비누로 감았다고 오이카와가 삼십 분을 잔소리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밥도 그가 챙겨주고 간 반찬들로 해결했다.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휘파람 연습에 열중했다. 벌써 몇 달째인데 제대로 된 휘파람이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휙, 휙 하는 바람소리가 줄어든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토비오는 커튼을 약간만 걷어보았다. 해를 보면 안 되는 흡혈귀를 위해 오이카와가 집 안 창문마다 쳐놓은 커튼에는 우습게도 해님이 그려져 있었다. 바깥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바람에 새싹 내음이 실려 왔다. 햇살도 한낮에는 제법 뜨거웠다. 해가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토비오는 봄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특히 오이카와의 옷자락에 묻어있는 봄 냄새가 좋았다. 오이카와가 집에 돌아오면 토비오는 그에게 뛰어들어 소매며 옷깃에 코를 부벼 봄바람, 햇살 냄새를 흠뻑 맡았다. 그러면 오이카와는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는데 아이는 그 손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오이카와가 부쩍 피곤해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힘이 없었고 아침에는 잘 일어나지 못했다. 지난주에는 프렌치토스트를 만들다 졸아서 빵이 새까맣게 타는 일도 있었다. 토비오가 조금만 더 오래 목욕을 했더라면 빵은 물론, 집까지 태울 뻔했다.

 

     오늘도 토비오를 안아주는 두 팔에는 기운이 없었다.

 

     선배, 피곤해요?”

     ? , 약간 피곤하네. 야근해서 그런가.”

     야근 안 하면 안 돼요?”

     혼자 집 보기 심심하구나? 바쁜 일 마무리되면 놀러가자.”

 

     내가 심심하니까 야근하지 말라는 이야기 아닌데. 토비오는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내일은 토비오가 그토록 기다리던 토요일이었다. 눈을 뜨면 선배가 있고, 선배와 밥을 먹고, 선배와 산책을 할 수 있는 휴일이었다. 토비오가 오이카와의 머플러를 풀어주며 그를 식탁으로 잡아끌었다.

 

     선배, 선배. 제가 저녁 차려놨어요.”

 

     애쓴 흔적이 역력한 식탁이었다. 물기를 미처 털지 않은 양상추며 으스러진 토마토가 어우러진 샐러드, 거뭇거뭇한 자국이 남아있는 계란 프라이, 한눈에 보기에도 설익은 밥. 멀쩡한 음식(?)은 디저트라고 가져다놓은 듯 보이는 우유빵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오이카와는 식탁 그득 놓여있는 그릇과 가지런히 놓여있는 수저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걸 전부 토비오가 만들었어?”

     , 선배 힘내시라고.”

     내가 엄청난 후배를 뒀네. 토비오도 차리느라 힘들었지? 먹자.”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샐러드를 살짝 털어내어 먹었다. 계란 프라이의 탄 부분만 요령 좋게 떼어내었다. 밥은 오래 꼭꼭 씹어 삼켰다.

 

     어때요?” 토비오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오이카와를 보았다.

     맛있네. 진짜 네가 한 거야?”

     그럼요! 진짜 제가 했어요.”

 

     칭찬에 긴장이 풀어진 토비오가 밥을 크게 떠서 넣었다. 퍼석퍼석한 밥알이 입안을 굴러다녔다. 오이카와가 해주던 밥과는 맛이 전혀 달랐다. 간신히 밥을 삼킨 토비오가 울상을 지었다. “선배, 맛이 이상해요.”

 

     이상하지 않아, 토비오. 밥 잘 했어. 오이카와 씨는 설익은 밥 좋아해요.”

     그래요?”

     토비오는 진밥이 입에 맞나보다. 그래서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라.”

 

     그런가... 토비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제 보니 샐러드도 계란 프라이도 오이카와가 해주었던 음식과는 외양이 사뭇 달랐다. 맛있는 밥을 해주고 싶었는데. 묵묵히 밥그릇을 비워내고 있었지만 오이카와의 피곤한 안색은 여전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어요.”

     진짜 맛있대도. 토비오가 연습까지 한다면 매일매일 도시락 만들어달라고 할지도 몰라.”

     만들어 드릴게요! 도시락 만들어 드릴게요!”

 

     토비오는 젓가락을 힘차게 쥐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밥을 먹고 목욕까지 하고 난 금요일 저녁은 노곤하기 그지없었다. 오이카와는 목욕으로 따뜻해진 토비오를 껴안고 소파에 기대어 반쯤 누워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가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으나 멀게만 들렸다. 저녁을 차리느라 힘들었는지 토비오도 오이카와에게 기대어 졸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큰 숨을 내쉬었다. 토비오가 말한 대로 그는 상당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화장실에서 기절을 한 적도 있었다. 비단 야근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토비오는 외출을 좋아해서 정 못 참겠으면 낮에도 나가곤 했는데 온몸을 무장해도 해를 본 날이면 몹시 힘들어했다. 그러면 오이카와는 토비오에게 피를 주었고, 이러한 나날이 반복되자 기어이 몸에 무리가 오고 말았다. 그러나 작은 흡혈귀가 하얗게 질려 축 늘어진 모습을 볼 바에는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오이카와는 핸드폰으로 빈혈에 좋은 음식 따위를 찾아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영락없이 젖을 물리는 어미 꼴 아닌가. 자식에게 이런 마음을 품는 어미는 없겠지마는. 세상모르고 잠든 토비오를 포옥 껴안으며 오이카와는 아이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아침에 눈을 뜬 토비오는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를 내려다보았다. 두꺼운 커튼을 걷어보니 어느덧 해가 중천이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열었는데도 눈이 시렸다. 흡혈귀인 토비오는 몰라도 오이카와라면 벌써 일어나 씻고 커피를 마시고 있을 시간이었다. 잠에 취한 토비오를 흔들며 잠꾸러기라고 놀리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오이카와는 여태껏 자고 있었다. 바닥에 누워 미동도 없었다. 토비오는 덜컥 무서워져서 오이카와의 코에 가만히 귀를 대어보았다. 규칙적인 숨결이 뺨을 간질였다. 휴우.

 

     토비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토비오가 작게 소리를 질렀다. 덩달아 오이카와도 몸을 일으키며 눈을 크게 떴다. 제 딴에는 그랬다. 눈에 무언가 얹어진 느낌에 오이카와는 눈두덩을 더듬거렸다.

 

     오이카와 선배, 울었어요? 눈이 부었어요.”

 

     토비오는 카레 크로켓을 사러 나간 자신을 안고 아이처럼 울던 선배가 떠올랐다. 길에 여전히 겨울 냄새가 가득했던 초봄의 일이었다. 토비오가 영문을 묻자 그저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했다.

 

     자는 동안 저 보고 싶었어요?”

 

     아이가 오이카와의 눈가를 슬슬 문질러주었다. 참으로 당돌했다. 오이카와는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웃었다. “그래, 엄청 보고 싶었어.”

 

     저도요오이카와에게 폭 안기던 토비오는 문득 한 곳에 눈을 고정했다. 선배의 턱에 수염이 올라와있었다. 드문드문 수염이 난 선배는 무척이나 어른스러워 보였다.

 

     선배, 수염 났어요.”

     그러네. 면도해야지

 

     토비오는 까칠한 수염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난 수염이 안 자라요.”

 

     아직 자랄 나이가 아닌가보다.”

 

     토비오가 입꼬리를 내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흡혈귀는 요즘 성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저 키 자란 것 같지 않아요? 어른은 언제 될 수 있어요? 저 방금 어른스럽지 않았어요? 쉴 새 없이 선배에게 묻고는 했다.

 

     어른이라고 모두 수염이 나는 건 아니야.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도 아니고.”

     ...”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토비오는 다시 오이카와의 부은 눈을 매만졌다.

 

     제가 아침 만들어 드릴게요.”

 

     소매를 걷어붙인 토비오는 자신 있게 부엌으로 향했지만 결과는 썩 신통치 않았다. 어제보다 계란 프라이의 생존율이 높긴 했지만 계란에 온 신경을 쏟는 바람에 토스트가 다 타버렸고, 커피는 엎질러 식탁보에 자국이 선명했다. 어찌 보면 지난 저녁보다도 처참했다.

 

     괜찮아, 토비오.”

     밖에 나가서 샐러드랑 빵 사올게요.”

     토비오.” 말리는 오이카와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토비오는 문을 열자마자 우뚝 멈추어 섰다. 하늘 한가운데 박힌 태양이 무섭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볕이 심하면 옷으로 몸을 감싸도 열이 피부에 박혀 들어왔다.

 

     나갈 수 없어.’ 흡혈귀니까.

 

     토비오는 덩그러니 서서 저를 따라 현관까지 나온 오이카와를 보았다.

 

     괜찮아. 냉동실에 얼려놓은 식빵 있으니까 그거 먹으면 돼. 우유도 남았고.” 이리 와. 오이카와가 손짓했다. 토비오는 왠지 눈물이 났다. 오이카와에게 받는 것에 비해 자신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도 적었다. 한낮에 선배가 좋아하는 우유빵을 사러 나갈 수 없었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선물을 사줄 수도 없었다. 그나마 하는 집안일은 형편없었다.

 

     나는 왜 사람이 아닐까?’

 

     저녁이 되자 토비오가 방에서 자와 펜을 가지고 나왔다. 늦어지긴 했지만 토요일마다 두 사람이 하는 일이 있었다. 오이카와와 토비오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안방 입구에 섰다. 문 옆의 벽에는 선과 날짜가 여럿 쓰여 있었다.

 

     허리 펴고. 고개 들고.”

 

     토비오가 팔을 몸에 붙이고 머리를 들었다. “됐어요?”

 

     . , 이제 잰다?”

     !”

 

     오이카와는 입으로 기계음까지 흉내 내어가며 토비오의 머리를 자로 쿡 눌렀다 떼었다. 펜이 벽을 지나가는 소리에 토비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 토비오. 키 자랐다.”

     정말요?”

     네가 봐봐.” 오이카와가 턱짓으로 벽을 가리켰다.

     정말이다! ! 오이카와 선배, 저 키 컸어요!”

 

     토비오는 가장 위에 그어진 선에 얼굴을 한껏 들이대고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며 소리쳤다. 아이의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우와, 진짜 키 컸다.” 토비오는 감격스러운지 연신 선을 만졌다.

     저도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럼.”

     저도 오이카와 씨 같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 오이카와 씨처럼 멋있고 섹시한 어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어른은 될 수 있고말고.”

 

     우와, 우와. 입을 다물지 못하는 토비오를 보며 오이카와는 말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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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스스로가 아직 성장기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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