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얼음장이 따로 없었다. 입김이 하얗게 부서졌다. 카게야마는 급한 대로 라디에이터를 틀고 두툼한 이불을 바닥에 깔았다. 외투를 벗을 수 있을 만큼 따뜻해지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리에프는 그동안 별 움직임이 없었다. 단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코로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카게야마 씨 냄새가 나요.” “냄새? 씻었는데... 미안.” 카게야마는 얼른 팔이며 옷을 들어 코를 대어보았다. 별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원래 제 체취는 잘 못 맡는 법이니까. “아뇨, 좋은 냄새. 따뜻한 냄새.” 리에프가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를 했다. 어쨌든 나쁜 냄새는 아니란 소리겠지. 카게야마는 리에프가 들고 있던 봉지를 받아 들고는 내용물을 차례대로 꺼냈다. 유부초밥이 하나, 둘, 셋, 넷..
자신을 하이바 리에프라고 소개한 남자는 카게야마를 동네 놀이터로 데리고 갔다. 낮이면 아이들이 까르르 뛰어노는 놀이터도 새벽 시간에는 한적할 따름이었다. 남자는 비어있는 빨간색 그네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는 긴 다리를 쑤욱 접으며 카게야마를 올려다보았다. “당신과 처음 만난 곳이랑 비슷해요.” “난 기억 안 나는데. 그보다 어릴 때 한 번 만난 나를 어떻게 찾아온 거지?” “길에서 우연히 보고 한 눈에 당신이란 걸 알았어요. 그 뒤는... 무작정 당신을 따라와서 이 근처에 산다는 걸 알았어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네 기억 속 어린 애가 내가 맞긴 해? 의심스러운 표정을 한 카게야마에게 리에프는 싱긋 웃어 보이더니 제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여름이었어요. 무지 더웠죠. 저는 주택가의 담벼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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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소 잔인한 묘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어린 시절, 딱 한 번 보았던 동화책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형들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 곰 인형, 무용수 인형, 공룡 인형 등 갖가지 인형들은 달빛을 받으면 살아나 움직이고 아침이 되어 달빛이 사라지면 실이 끊긴 듯 자리에서 픽 쓰러졌다. 그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실이 끊긴 인형. 자신의 발치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는 그야말로 인형이었다. “못난이 인형.” 남자는 시체를 발로 툭툭 차며 중얼거렸다. 문득 편안히 감고 있는 눈이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잠도 제대로 못 잤었는데.’ 남자가 칼을 꺼내어 눈꺼풀을 도려냈다. 멍청하게 흐려진 눈알 위로 피가 흘렀다. 불쾌함에 눈썹을 찡그린 남자는 시체의 얼굴에 한참동안 발길질을 했다. 힘없는 머리..
* 다소 잔인한 묘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난 항상 당신의 살굿빛 손끝을 그리며 잠들곤 했어요. 현대사회의 도시는 어느 곳이나 똑같겠지만, 도쿄는 유달리 잿빛이 무수했다. 따뜻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콘크리트 덩어리가 위로 치솟아있는 꼴이라니. 카게야마는 계절과 시간을 가리지 않고 무례하게 하늘을 가로막는 그것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시커먼 그림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림자(影)는 인간 내면에 잠자고 있는 무언가를 일깨우는 듯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대부분 흉포하거나 잔인하기 마련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러한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무심코 고개를 드니 작은 달이 구름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비치고 있었다. 하늘과 도시는 풍경이 늘 반대였다. 하늘이 파랗게 빛을 내면 도시가 그림자에 죽었고, 하..
남자는 네 번 만에 간신히 얻게 된 새 직장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고양이 방울”이라는 이름이 가게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어감이 너무 귀엽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가 가게에 가진 불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무분별하게 폭력성을 드러내는 상사도 없었으며 은밀한 회원제 클럽인 것치고는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클럽을 운영하는 게 이 바닥에서 이름이 꽤나 통한다는 조직이어서인지 시비를 걸거나 난동을 부리는 손님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지금 적잖이 당황하여 “카, 카드가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라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왜요?” 장신의 사내가 정말 모르겠다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되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사내는 어딘지 모르게 위압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