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얼음장이 따로 없었다. 입김이 하얗게 부서졌다. 카게야마는 급한 대로 라디에이터를 틀고 두툼한 이불을 바닥에 깔았다. 외투를 벗을 수 있을 만큼 따뜻해지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리에프는 그동안 별 움직임이 없었다. 단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코로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카게야마 씨 냄새가 나요.” “냄새? 씻었는데... 미안.” 카게야마는 얼른 팔이며 옷을 들어 코를 대어보았다. 별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원래 제 체취는 잘 못 맡는 법이니까. “아뇨, 좋은 냄새. 따뜻한 냄새.” 리에프가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를 했다. 어쨌든 나쁜 냄새는 아니란 소리겠지. 카게야마는 리에프가 들고 있던 봉지를 받아 들고는 내용물을 차례대로 꺼냈다. 유부초밥이 하나, 둘, 셋, 넷..
자신을 하이바 리에프라고 소개한 남자는 카게야마를 동네 놀이터로 데리고 갔다. 낮이면 아이들이 까르르 뛰어노는 놀이터도 새벽 시간에는 한적할 따름이었다. 남자는 비어있는 빨간색 그네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는 긴 다리를 쑤욱 접으며 카게야마를 올려다보았다. “당신과 처음 만난 곳이랑 비슷해요.” “난 기억 안 나는데. 그보다 어릴 때 한 번 만난 나를 어떻게 찾아온 거지?” “길에서 우연히 보고 한 눈에 당신이란 걸 알았어요. 그 뒤는... 무작정 당신을 따라와서 이 근처에 산다는 걸 알았어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네 기억 속 어린 애가 내가 맞긴 해? 의심스러운 표정을 한 카게야마에게 리에프는 싱긋 웃어 보이더니 제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여름이었어요. 무지 더웠죠. 저는 주택가의 담벼락이..
쿠로오가 사는 맨션은 그가 자주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차가운 공기가 맴돌았다. 옷장이며 식탁, 선반 등 필요한 가구는 모두 갖춰져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사람이 쓴 흔적은 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의자에 걸려있는 셔츠와 식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넥타이가 이 집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흩어져있는 옷가지를 하나하나 집어 올리며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뒤를 따라갔다. 느릿하게 걷던 쿠로오가 침실에서 넥타이에 손을 댔을 때에는 카게야마 양팔에 이미 옷가지가 한가득 걸려있었다. “그냥 내버려둬도 되는데.” “치우는 게 맘이 편합니다.” ‘어차피 또 금방 어지럽힐 건데.’ 쿠로오는 마지막 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겉옷을 벗어 대충 의자에 걸쳐놓으려 했으나 카게야마는 그마저도 기어코 받아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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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소 잔인한 묘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어린 시절, 딱 한 번 보았던 동화책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형들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 곰 인형, 무용수 인형, 공룡 인형 등 갖가지 인형들은 달빛을 받으면 살아나 움직이고 아침이 되어 달빛이 사라지면 실이 끊긴 듯 자리에서 픽 쓰러졌다. 그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실이 끊긴 인형. 자신의 발치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는 그야말로 인형이었다. “못난이 인형.” 남자는 시체를 발로 툭툭 차며 중얼거렸다. 문득 편안히 감고 있는 눈이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잠도 제대로 못 잤었는데.’ 남자가 칼을 꺼내어 눈꺼풀을 도려냈다. 멍청하게 흐려진 눈알 위로 피가 흘렀다. 불쾌함에 눈썹을 찡그린 남자는 시체의 얼굴에 한참동안 발길질을 했다. 힘없는 머리..
* 다소 잔인한 묘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난 항상 당신의 살굿빛 손끝을 그리며 잠들곤 했어요. 현대사회의 도시는 어느 곳이나 똑같겠지만, 도쿄는 유달리 잿빛이 무수했다. 따뜻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콘크리트 덩어리가 위로 치솟아있는 꼴이라니. 카게야마는 계절과 시간을 가리지 않고 무례하게 하늘을 가로막는 그것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시커먼 그림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림자(影)는 인간 내면에 잠자고 있는 무언가를 일깨우는 듯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대부분 흉포하거나 잔인하기 마련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러한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무심코 고개를 드니 작은 달이 구름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비치고 있었다. 하늘과 도시는 풍경이 늘 반대였다. 하늘이 파랗게 빛을 내면 도시가 그림자에 죽었고, 하..
◆ 발표가 되자마자 그동안의 작품과는 다른 몽환적이고 따뜻한 문장으로 단번에 독자들을 사로잡은 오이카와 토오루의 『별빛 사막』. 애니메이션 제작까지 결정되면서 작품을 향한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오늘은 섬세한 감정 묘사와 뛰어난 문장력에 더해 본인의 수려한 외모까지 단연 화제인 오이카와 토오루를 만나보았다. 이제껏 오이카와 토오루의 작품이 씁쓸한 에스프레소였다면 이번 “너의 색깔”은 따뜻한 우유 같은 작품이라고들 합니다. 그만큼 작품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말인데요. 혹시 계기나 이유가 있을까요? ―친한 편집장님이 사람 많이 죽였으니까 이번엔 살리는 이야기를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신 게 계기라면 계기겠네요(웃음). 그 말을 듣고 나니 정말로 제 책은 꼭 누군가가 죽더라고요. 읽고 나면 힘이 나는 이야기..
* 오이카와 토오루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토요일이었다. 한 가지 다르다면 직장 후배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원치도 않은 주말 출근을 했다는 점이었다. 선배는 이렇게나 쓸모없는 지위이다. 후배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떡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하지 않으면 성가셔진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오늘은 그나마 후배가 눈치 있게 움직여서 일을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점심에 후배가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선배. 오늘이 할로윈이래요. 퇴근길에 볼만하겠어요. 후배의 말대로 길거리는 할로윈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곳곳에 호박이며, 박쥐 장식이 눈에 띄었다. 상점 입구에서는 마녀 모자를 쓴 직원이 사탕을 나눠주었다. 뱀파이어처럼 화장을 한 남녀 한 쌍이 오이카와의 옆을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젊구나. 감상은 그게 다였..
소년은 사막 한복판에 있는 마을에서 친구를 사귀게 된다. 모두가 가방에 가면을 한가득 짊어지고 다니는 별임에도 친구는 양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거리를 돌아다닌다. 친구는 상냥하지도, 잘 웃지도 않았지만 햇빛이 강할 때면 얼굴을 찡그렸고, 시원한 바람이 불면 눈을 감은 채 슬며시 웃었다. 그는 가면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소년은 곧장 마을 근처의 모래 언덕에 물감을... 느릿느릿 키보드를 두드리던 오이카와의 손이 별안간 멈춘다. 그러더니 이윽고 키보드가 부서져라 백스페이스키를 연달아 누른다. 제일 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충 인터넷으로 주문한 노트북이 다시 고장 나도 상관없다는 듯한 행동이다. 그걸로도 성에 차지 않는지 노트북을 쾅 닫아버리고 침대 위에 벌렁 누워버리지만 그마저도 눈치 없는 핸드폰이 마..
바닥에 각종 컵라면 용기가 나뒹굴고 무엇이었는지 추측할 수 없는 액체가 먼지와 뒤엉겨 바닥에 달라붙어 있다. 그 위를 날벌레가 어지러이 배회한다. 잡동사니와 치우지 않은 쓰레기로 엉망이 된 집 한가운데에 누워 오이카와가 머리를 쥐어뜯는다. 감지 않은 이리저리 헝클어져 산발이 심란한 그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미치겠네.” 결국 노트북이 가고 말았다. 사망 시각 금요일 오전 1시 25분. 작업 도중 화면이 멈췄는데, 조금 있으면 돌아오겠거니 하고 커피를 가져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기하학적인 화면을 띄우고 있는 노트북이었다. 이후로는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고 오이카와의 정신도 반쯤 나가고 말았다. 백업을 해두지 않았는데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을까? 안 되면 어떡하지? 모아둔 자료와 원고 활자가 눈앞에 어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