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음의 기준은 무엇인가. 단지 호흡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나는 한낱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이에 어떤 이는 나의 시간을 경외했으나 어떤 이는 섭리에서 벗어난 이단이라며 저주했다. 저주가 통한 걸까, 수없이 많은 존재가 세상에 떨어졌다가 스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내 삶과 죽음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져갔다. 태양과 달은 매일 새로웠지만 늘 같은 하늘을 맴돌았고, 인간은 저마다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일정한 범주 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기나긴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알 수 없던 거대한 세계 속에서 보자면 그들은 쳇바퀴를 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 나는 오래 전 내게 이단이라 손가락질했던 인간을 비웃었다. ..
※ ZE au. 운명의 상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서로 이어져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실은 너무 약하고 금방 끊어질 것 같잖아. 그러니까 나는 붉은 실이 아니라 붉은 끈으로 당신을 얽고 얽어서 절대 끊어지지 않도록,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할 거야. 가문의 언령사 하나가 재로 돌아갔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였으나 죽음은 나이를 따지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인해 그의 카미(紙)가 손쓸 틈도 없이 죽었다. 장례식은 식(式)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게 치러졌다. 조문객은 거의 없었다. 가문 내에서 그다지 평판이 좋은 사내가 아니었던 탓이다. 언동이 난폭하여 일반인 앞에서도 언령(言靈)을 사용해 가문 전체가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카미를 거칠게 다루어 백지(白紙)..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얼음장이 따로 없었다. 입김이 하얗게 부서졌다. 카게야마는 급한 대로 라디에이터를 틀고 두툼한 이불을 바닥에 깔았다. 외투를 벗을 수 있을 만큼 따뜻해지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리에프는 그동안 별 움직임이 없었다. 단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코로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카게야마 씨 냄새가 나요.” “냄새? 씻었는데... 미안.” 카게야마는 얼른 팔이며 옷을 들어 코를 대어보았다. 별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원래 제 체취는 잘 못 맡는 법이니까. “아뇨, 좋은 냄새. 따뜻한 냄새.” 리에프가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를 했다. 어쨌든 나쁜 냄새는 아니란 소리겠지. 카게야마는 리에프가 들고 있던 봉지를 받아 들고는 내용물을 차례대로 꺼냈다. 유부초밥이 하나, 둘, 셋, 넷..
*연반AU 1월의 분위기는 하늘의 떠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왠지 모를 부유감과 함께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간다. 바뀌는 것은 달력의 숫자뿐이며 해가 바뀐다고 해서 인생이나 생활이 달라지지도 않는데 사람들은 기대가 가득 찬 표정으로 거리를 오고간다. 특히나 카게야마의 직장인 바(Bar)가 있는 번화가는 더욱 그러했다. 카게야마는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을 떠올렸다. 알코올에 취해 얼굴이 붉어진 손님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카운트다운을 했고 새해가 되자마자 저마다 들고 있던 술잔이나 술병을 비웠다. 왁자지껄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카게야마는 새해 인사를 건네 오는 손님들에게 적당히 인사를 하며 셰이커를 흔들었다. 한 해가 갔다는 아쉬움도,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는 고양감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 한국 정식발매본에 나오지 않은 캐릭터가 나옵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주의 부탁 드립니다. *카게른2 온리전에 나왔던 배포본 글 중 하나입니다. 신분을, 사람을, 목숨을 사고파는 시대에 멀쩡한 인간이 어디 있고 제대로 된 집안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내가 속해있는 가문은 특히나 제정신이 아니었다. 네 번의 혼인과 세 번의 이혼, 그리고 한 번의 사별. 아버지는 무슨 능력이라도 있는 건지 부인들에게서 각각 아들 하나씩을 얻었다. 나는 그 중 세 번째였다. 윤리나 도덕심이라고는 희박한 아버지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가문의 후계는 오직 장자(長子)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서 첫째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은 이름조차 물려받지 못하여, 한 집안의 형제가 모두 성씨가 다른 기막힌 희극이 펼쳐..
유곽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세계는 어항 속이나 다름없다. 놓여진 선택지는 대개 다른 사창가나 가게로 팔려가거나, 가업을 물려받거나 하는 둘 중 하나였다. 이따금 아이를 큰 도시나 다른 마을로 보내어 키우는 이들도 있었지만 극히 일부였다. 불행하게도, 카게야마는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어미는 몸을 파는 유녀였으며 아비는 기둥서방이었다. 젊은 시절엔 수려한 용모로 인기깨나 끌었다는 어미는 세월과 고단한 삶에 아름다움이 바랬고, 가게에서도 쫓겨났다. 집 옆에 붙어있는 창고를 개조해 만든 허름한 방이 그녀가 몸을 파는 가게였다. 아비는 어떠냐 하면, 날건달이 따로 없었다. 아내가 돈을 벌어오는 족족 노름판을 기웃거렸는데, 잘 되는 날에는 기분이 좋다며 술을 마셨고, 풀리지 않는 날에는 액땜을 해야 한다며..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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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하이바 리에프라고 소개한 남자는 카게야마를 동네 놀이터로 데리고 갔다. 낮이면 아이들이 까르르 뛰어노는 놀이터도 새벽 시간에는 한적할 따름이었다. 남자는 비어있는 빨간색 그네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는 긴 다리를 쑤욱 접으며 카게야마를 올려다보았다. “당신과 처음 만난 곳이랑 비슷해요.” “난 기억 안 나는데. 그보다 어릴 때 한 번 만난 나를 어떻게 찾아온 거지?” “길에서 우연히 보고 한 눈에 당신이란 걸 알았어요. 그 뒤는... 무작정 당신을 따라와서 이 근처에 산다는 걸 알았어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네 기억 속 어린 애가 내가 맞긴 해? 의심스러운 표정을 한 카게야마에게 리에프는 싱긋 웃어 보이더니 제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여름이었어요. 무지 더웠죠. 저는 주택가의 담벼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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