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바스락, 양 손 가득 봉지를 든 오이카와의 입꼬리는 한껏 위로 올라가 있었다. 카레를 좋아하는 녀석을 위해 오늘 저녁은 직접 카레를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대로 재료를 샀다. 이것저것 넣다 보니 짐이 꽤 늘었다. 냉장고에 있는 우유도 거의 다 떨어져서 넉넉히 두 병을 샀다. “토비오, 나 왔어.” “아, 선배. 오셨어요.” 이런저런 사이가 되고 같이 살게 된 게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카게야마에게는 아직도 딱딱한 운동부 말투가 남아있었다. 몇 번이나 말투를 바꾸라고 해도 입에 붙은 버릇을 고치기가 영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게야마가 앉아있던 책상 위에는 인쇄물과 책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손으로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공부와 담을 쌓아도 한참을 쌓았..
쿨럭쿨럭 기침을 하면서 스가와라는 비죽 헛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린 현실이 퍽 우스웠다. 얼마 전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다했는데 연습으로 진탕 땀을 흘리고 집으로 돌아와 무작정 에어컨 바람을 쐰 것이 원인인 듯 했다. 불행히도 연습 때문에 자신만 남고 가족들은 여행을 갔기에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말이라 연습이 없는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3학년씩이나 되어서 후배들에게 건강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특히 카게야마에게는 더욱 그랬다. 아, 약을 사러 가야하는데. 몸살 기운도 있어서 온 몸이 저릿저릿하고 기운이 없었다. 병원은커녕 약국에도 갈 자신이 없다. 그냥 침대 위에서 물먹은 솜 마냥 추욱 가라앉아있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간..
연습이 없는 주말이었다. 연습은 하루도 쉴 수 없다며 카게야마는 바득바득 우겨서 스가와라와 함께 동네 공터로 나갔다. 그러나 사십 분 뒤, 둘은 나란히 스가와라의 집 방바닥에 반쯤 녹은 사탕처럼 축 눌어붙어 있었다. 원인은 폭염이었다. 사실 오늘은 폭염주의보가 발령된 날로, 길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였다. 이런 날에도 카게야마는 연습을 빼먹을 수 없다며 바득바득 우겼다. 평소 카게야마의 연습욕은 충분히 알고 있었던 터라 스가와라는 어쩔 수 없이 같이 나가주긴 했지만 연일 열사병 환자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는 요즘이었다. 바알간 뺨을 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카게야마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내버려두었다가는 이번에는 K모군이 뉴스에 나올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자신이 더..
찰칵하고 휴대전화의 셔터 효과음이 울렸다. 이질적인 그 소리는 시장통 같은 체육관 안에서도 스가와라의 귀에 꽂혔다. 옆을 돌아보니 카게야마가 허겁지겁 손을 뒤로 숨기고 있었다. 틀림없이 휴대전화겠지. 요즘 녀석은 수상했다. 카게야마는 사진을 찍거나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일주일 전 갑자기 비장한 태도로 스가와라 선배, 웃어주세요 라고 말하기에 영문도 모르고 어색하게 웃어줬더니 휴대전화로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뭐라고 물어볼 틈도 없이 휙 하니 도망가 버렸다. 그 뒤로 카게야마는 자신을 수시로 찍었다. 장소도 가리지 않고 말도 없이 찍어댔다. 파파라치에게 찍히는 연예인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딴에..